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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요리의 변천사와 불교

by 삼대디 2023.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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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포스팅에서는 일본 요리의 변천사와 일본요리와 불교와의 관계를 통해 일본요리에 미친 영향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요리의 변천사



수렵과 어업민족이었던 일본인의 식생활은 530년경 중국에서 우리나라 백제를 거쳐 일본으로 전파되어 불교와 함께 변하기 시작했다.


이후 700년 경 우리나라의 통일신라 시대의 이르러 궁중 의식과 신에 대한 의식 등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일본 요리의 체계도 이 시기에 확립되었다.



우리나라 고려 건국 후 일본은 "요우로우리스로우"에 의해 보정되어 여러 가지 의식을 행하는 방법과 요리를 만드는 방법,


신에게 곡물을 바치는 방법 등이 세밀하게 규정된 연희식이라는 것으로 완성되었다.



연희식에는 향응 (음식 술 등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연회)의 선형식과 연중행사 오절구인 성인의 날,  여자 어린이날, 어린이날,  칠석날,  중앙절 등의 각종 계절 행사 요리도 정해졌다.


이때에는 조리 기술의 진보와 더불어 그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에서도 현저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밥과 부식을 담는 그릇을 시작으로 술잔, 받침대 등에도 고대의 예술성이 가미된 작품이 등장하게 된 시기였다.


또한 이 당시에는 신분에 따라서 그릇이 달라지는 도구의 계급 제도가 생겨나 귀족은 청동기, 은기, 옻기 등을 사용하였다.



이 무렵은 '헤이안지다이'라고 불리는 귀족 지배의 시기였다.

당시의 고고덴로후( 9세기 중엽)가 요리를 좋아하여 요리 연구에 열성적이었다.


또한 요리 연구를 정리하여 더더욱 많은 요리를 후세에 전해주었고. 고고덴로후는 현대에 전해져 오는 요리도의 사조류의 개조로서 '요리의 신'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와 같이 요리의 연구는 비약적인 발전을 보여왔지만 귀족 사회의 식사가 아침저녁 두 끼로 형식화됐고 이와 함께 살생 금지력 등 포유동물의 식욕 금지로 인하여 영양의 균형이 맞지 않아 영양실조와 같은 상태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때 지금까지의 공가(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 귀족의 사치로 여겨져 왔던 형식적인 식사 풍습 등을 혁파하는 질식강건의 첫째로, 하는 무가정신의 경향이 다시 대두되었다.


즉 무사는 항상 심신을 단련하여 전시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사냥 등이 부활되었고 부식으로 고기도 먹을 수 있도록 식사 관습이 바뀌었다.



또한 삼식주의의 간섭도 정착되어 무가사회의 시대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또 대륙문화, 즉 중국과 조선과의 교류도 활발해짐에 따라 스님 등에 의하여 국내 선종이 확산된 것을 계기로 사찰에서는 정진 요리와 보차 요리가 생기게 되었다.


두부 등이 처음 만들어진 것이 이때쯤이며 또한 차 점심 (차에 곁들여지는 것, 과자, 절임 등) 짜노고 등도 볼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이러한 사회 상황에서도 귀족과 공가의 향응에 있는 선에는 변화가 보이지 않고 계속 지속되었다.


1338년 바쿠후가 가마쿠라에서 교토 무로마치로 옮겨 무가와 공가의 교류가 성행하고 동산문화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


이 시대는 우아한 생활을 과시하는 사회가 되어 요리의 세계에서도 사조류, 대초류, 신사류 , 그리고 생간류 등의 다양한 세력들이 형성됐다.



각파는 요리 만드는 법을 포함하여 조리기술, 자르는 방법에 기교를 집중시킨 고도의 기술을 개발하는 등



경쟁이 심화됨으로써 일본의 요리기술과 조리법이 두드러지게 진보하는 요리계의 전국 시대를 열어 나갔다.


아울러, 공가 사회와 무가 사회의 쌍방에 예법이 생겨나 축의의식이 더욱더 엄격해져 식의 선이 정해지고, 식사 예법에 따라 본선 요리의 향응 형식이 생긴 것도 이때쯤입니다.



1500년경 천리휴( 오차나 오차를 만들 때 사용하는 도구를 만드는 사람) 들에 의해서 차도가에 따라 다도와 차회석이 완성되었다.



이 당시에는 외국과의 교류 무역이 성행하여 남만 요리 (쇠고기나 닭고기 생선 등을 파를 넣어 섞어 졸인 음식) 등도 건너와서 일본인의 식생활도 점차 육식으로 바뀌게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1639년에도 도쿠가와 시대에 세국령이 떨어져 다시 생성과 자체 위주로 하는 식생활이 되돌아갔다

이때는 완전한 무가정치의 시대였지만 중산층의 활약이 눈부셔 상인들이 부가위력을 발휘하여 사치스러운 요리와 호화스러운 그릇을 쓰는 주연 요리가 유행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많은 고급 요리점과 차실 (다과회를 하는 방) 이 생겨나 요리 문화의 발전이 지속되었다.



엄격한 예의작법의 얽매임 속에서도 더욱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본선요리와 회석요리는 어지럽게 변하는 사회에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요리다실에서 소외되고 그것에 대응하는 주연을 중심으로 한 회석 요리가 생겨났다.



중산층의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은 순수한 미각과 식선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기에 이르러 음식의 유희화가 되고 그 위의 연석이 사교의 장으로서 이용되게 되었다.

일본요리와 불교


1800년경에는 본선요리, 정진요리 회석요리, 중국요리, 남만요리 등의 상호 융합하여 소화흡수되는 시대로서 일본의 독특한 요리문화가 완성되었다.


많은 국가가 그러하듯 요리의 발전 과정은 나라의 종교와 깊은 관계를 지니고 있다.


일본 요리의 발전 과정은 신과 불교의 공물과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다.


또 일본요리는 요리 전국 시대에 많은 유파가 생겨나 서로 경쟁해 가며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일본요리가 이론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요리의 큰 흐름을 총괄해 보면 귀족 무가지배 봉건사회에서 향응의 접대 연회는 상층 계급이 하층 계급에게 '밥상을 받게 해 주고' '위로해 준다'는 형식이었고 엄격한 식사 작법이 요구되었다.


그것이 명치 후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변화해 오면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안락한 분위기에서 즐기는 '식미본위'의 주연을 중심으로 한 향응의 회석요리가 주류를 이루어 왔다


현재 이 회석요리는 결혼 피로연 그다음에 희수( 77세 잔치) , 미수 (88세의 잔치) 등의 축하연과 일반 연회 등 모든 초청연회에서 사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회석 요리는 때로는 본선 형식을 도입하기도 하고, 차회석의 흐름을 추가하기도 하면서 제각기 운용할 수 있게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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